대상
오십살 젊은 새댁
박OO(장흥읍)
장흥에 온 날 : 2016년 3월 14일
마을에서는 젊은새댁으로,
숲에서는 아이들에게 다람쥐 선생님으로,
4개의 모임에서는 총무님으로 불리는
하루 24시간이 짦은 정도로 바쁘게,
그리고 재미나게 시골생활에 스며들고 있는
젊은 새댁의 장흥 정착이야기
"여보! 오늘 나 사표냈어!"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웃는 얼굴로 크게 소리친다.
예전에 몇 번인가 회사를 옮길 때마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던 남편이 이번에 아주 신이 났다.
옛날부터 회사 관두고 시골로 내려가 살자고 했지만 막상 그 일이 코앞에 닥치니 덜컥 겁이 났다.
한창 일할 나이인 사십대 후반인데 벌써 퇴직하고 시골로 내려간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 모두 걱정스런 눈길이다.
"시골 가서 뭐 해먹고 살건데? 어디로 가는데? 거기연고는 있고?"
다들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다.
"그냥 조그만 집하나 짓고 텃밭이나 일구면서 살죠 뭐! 아직 젊은데 우리 할 일 하나 없겠어요?"
남편의 답에 어르신들은 철딱서니 없다고 혀를 차신다.
서울에서 30년을 살았으니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무방하고 시골생활이 낯설게 느껴질 때 남편이 느닷없이 "우리 나중에 시골가서 살까?" 했다.
처음엔 농담 이겠거니 하고 곧바로 "그럽시다!" 고민없이 답했던 그 말이 이젠 현실이 되었다.
귀촌하기로 결심한 후 우선 귀촌지 물색에 나섰다.
산이 있고 바다가 있으며 우리 부부 둘다 추위를 많이 타니 따뜻한 곳으로 정하자고 의견을 좁혔다. 거제, 통영에서부터 목포까지 바다를 끼고 있는 남도쪽으로 가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강진과 장흥으로 좁히고 약 5년동안 시간날 때마다 내려와 경치도 구경하고 맛있는 그 지역 음식도 먹어가며 신나게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오래전부터 귀촌을 결심한 남편은 장흥으로 먼저 귀촌해 사시는 블로거들과 일친을 맺고 계속 연락을 하며 정보를 얻고 있었는데 일단 그 집에 가보기로했다.
장장 5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장흥. 전국에 안가본 곳이 드물 정도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왜 장흥은 몰랐을까.
장흥읍에서 다시 40여분을 달려 블로거가 살고 있는 어촌마을에 도착했다. 모내기철이 한창일 때였는데 동네 공동 우물에서 할머니들께서 모여 앉아 모내기 후 흙에 묻은 옷을 빨고 계셨다. 왜 세탁기로 빨지 않느냐고 물었고, 흙이 많이 묻어 초벌 빨아 세탁기에 돌리신다고 하셨다. 한참을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시골살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후 난 도저히 여기 내려와서 살 자신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랬더니 남편은 그럼 4계절을 다 체험해보고도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시골생활의 꿈을 접겠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장흥 나들이가 해가 바뀔 때마다 느껴지는 시간이 5시간이 4시간이 되고 조금씩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져 옴을 느꼈다.
계절이 바뀌면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세달에 한번씩은 내려왔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산. 그리고 강을 한꺼번에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정남진 장흥이다. 장흥은 언제 오더라도 포근하고 정겹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장흥은 한마디로 풍요와 안식의 땅 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동네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묻자 반감을 가지고 대답해주지 않던 사람들이 2년, 3년 계속해서 내려와 찾아가니 조금씩 마음을 열고 조언을 해주시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 를 많이 키우고, 지역민들 성향은 어떻고, 땅이나 집값은 어디 어느 정도인지 등등 시골생활을 준비하는 젊은 예비 귀촌자에
게 너무도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말씀뿐만 아니라 그때 그때 수확한 제철 과일이며 채소들도 트렁크에 가득 실어 주시며 다시 꼭 오라고 손잡아 주시는 어르신들 때문에 이젠 장흥이 낯설지 않은 연고지로 바뀌었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던 장흥의 풍경이 이제 내가 살아갈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친근하게 우리를 반기는 것 같았다. 할미꽃이 지고 나면 삐비가 새어 하얀 꽃가루가 온통 동산위에 흩날리고 탁트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한재공원을 좋아하고, 노란 유채밭과 소금가루가 뿌려져있는 듯한 메밀이 익을 무렵 메밀묵과 막걸
리 한잔으로 한주의 피로를 달래주는 선학동, 장흥의 랜드마크인 편백향 가득한 우드랜드, 글램핑을 할 수 있는 심천공원, 정남진전망대, 5월이면 철쭉들의 향연을 볼 수 있는 제암산, 가을엔 억새가 춤을 추는 천관산의 비경, 천년의 고찰 보림사 가는 길의 애기단풍이 우릴 반겼고, 초무침을 맛있게 먹었던 수문해수욕장까
지 조그만 시골에 뭐가 이리 많나 싶게 우리를 바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장흥을 소개할 때 무엇 한가지를 얘기하기는 너무 힘든 일이다.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가득하고 바다와 산이 드넓은 평야와 함께 있는 곳 장흥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천혜의 힐링 청정지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내려와서는 관산에 집을 지어 텃밭을 일구는 전원생활을 꿈꾸었다.
집짓기에 적당한 밭을 구입하고 관산읍에 월세를 얻어서 드디어 소꿉놀이 같은 장흥에서의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남편은 어렵지 않게 직장을 잡았다. 도시에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보수가 작아도 그저 일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구하니 금방 일자리가 나왔다. 장흥에서 남자 50살은 젊은이에 속한다.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내려가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남편의 생각이 정
확히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관산에서 살아본 3개월 동안의 시골생활이 나를 전원생활의 꿈에서 확 깨어나게 해주었다. 오후 5시면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저녁식사 후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가로등이 없어 어두컴컴해서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시의 화려한 밤문화에 길들여진 나를 무척 힘들게 했다. 결국 주변사람들의 권유로 장흥읍으로 이사를 왔다.
장흥을 방문할 때마다 토요시장을 들렀었고 그때마다 탐진강변의 아름다움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정감이 있는 장흥읍에 정착
하는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우리집 이웃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살고 계시는 터줏대감들이었고 젊은 부부가 이사왔다며 좋아하셨다. 나이 50에 젊은 새댁이라는 소리를 듣고, 한달에 한번 반상회겸 주변 청소를 하는 날이면 내 손 다친다며 당신들이 다 일하시고 난 그냥 서있으라고 하신다.
(우리 부부는 대청소날을 울력이라 표현한다. 어르신들이 잠이 없으셔서 한달에 한번 울력을 하는데 주말아침 6시에 집합을 시킨다.)
난 단지 그냥 밝게 웃고 인사드리며, 비오는 날이면 부침개를 부쳐서 가져다 드렸을 뿐인데 어느날 부터인지 우리집 문고리에 검정 봉투가 걸려있다. 이웃 주민들이 텃밭을 일구며 가꾼 야채들을 가져다 주신거다. 행여나 아침 일찍 잠 깨울까봐 조심스레 문고리에 걸어두시고 가는 배려심이 느껴진다. 이렇게 나도 이 마을에 조금씩 스며들어 가고 있구나 싶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도시에서는 층간 소음으로 인해 이웃간에 다툼이 있고 결국 이사까지 가는 일이 허다한데 반해 시골인심은 그저 웃기만 한다. 막내 딸 시골생활이 궁금한 우리 엄마, 친구 부부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하는 친구들, 도시에서 알고 지냈던 지인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염려로 여름 휴가철이나 주말이면 찾는 사람들로 우리집은 항상 북적인다. 주위분들에게 미안한 맘으로 “죄송해요. 저희집이너무 시끄럽죠?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와서요”라고 하면 “에고 무슨소리여, 아무소리도 안들리던데. 그리고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것은 좋은 것이여”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주신다. (참고로 우리 건물은 20년이 넘은 건물이라 방음이 전혀 안된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도시에서의 저녁시간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다. 콩나물 시루와 같은 지옥철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시골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여유가 생겨났다. 퇴근 후 집에 오는 시간은 노래 한곡 들으면 도착할 정도로 가깝고, 밥먹고 청소하고 집안일을 이것저것 해도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저녁이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주어지니 이것이 시골살이의 가장 큰 혜택이 아닐까 싶다.
처음엔 저녁마다 탐진강변을 산책했다. 벚꽃이 필 때면 꽃을 보려고 막히는 도로를 몇시간 운전해서 잠깐 사진만 찍고 다시 돌아갔던 옛날이 생각나 우리
부부는 마주보며 웃곤 했다. 차츰 주변분들 알게 되니 복지관이며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생활모임을 소개해 주었다. 잠깐의 시
간만 투자하면 저렴하고 때론 강습비도 없는 프로그램들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정작 이곳 분들은 지역 프로그램들의 고마움을
잘 모르는거 같다. 늘 곁에 있고 항상 프로그램이 진행되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인가 보다. 도시에서는 프
로그램 하나 배우려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난 요일 별로 장구, 난타, 줌바댄스, 차모임에 가입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배우고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다.
장흥에 오면 항상 들르는 곳이 편백숲 우드랜드였다.
수령이 50년 넘는 빼곡히 솟은 편백나무들의 자태를 보고 홀딱 반해 처음엔 우리 부부만 찾던 곳이 다음해엔 친정식구들과 여름휴가를, 그 다음해엔 시댁식구들과 다시 찾았다. 지금에서야 우드랜드의 모든 길이 한눈에 보이지만 탐방객으로 왔을적엔 탐방로가 많아 어디로 다녀왔는지도 잘 몰랐지만, 숲이 주는 안정감과 평안함에 반해 남편에게 “나 여기 장흥으로 오면 우드랜드에서 근무하고 싶어요. 청소라도 괜찮아요”라고 했다. 나의 꿈은 현실로 이어졌다.
장흥으로 내려오는 첫 해에 우드랜드에서 근무하시는 유아숲 지도사가 사정이 생겨서 그만두게 되어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치원 근무 경력이 있는 나는 곧바로 지원을 했고 면접 후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던 곳에서 근무를 하니 일하는게 즐거웠고, 숲을 찾아오는 아이들도 귀여운 토끼와 같았다.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과 곤충들을 탐구하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면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적셔지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즐거운 나날이다. 이젠 길거리에서 “야! 다람쥐 선생님이다.”하고 아는 체 하는 아이들이 꽤 늘었다.
탐방객들이 말을 건네온다.“여기에서 근무하세요? 월급을 받아야 하는게 아니라 돈을 내고 근무하셔야 겠어요. 이런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니 얼마나 좋으세요?”맞는 말이다. 공기 좋고 푸르른 숲에서의 생활은 감기를 일년내내 달고 살았던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장흥에서 4번의 겨울이 지나갔지만 감기한번 걸리지 않았다.
처음 내려왔을 땐 향수병에 걸려 힘든시기도 있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밤이면 화려한 네온싸인에 휘청거려 보기도 싶고, 대형마트나 백화점에 들러 쇼핑도 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단체톡 방에서 번개를 할 때면 나도 서울에 있었으면 모임에 참석 해서 재밌는 시간을 즐길 수 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럴때면 남편은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허전한 맘을 달래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위안을 받았고 차츰 포기라는 걸 하게 되었다. 지금은 친구들의 급 번개에 내 마음이 소용돌이 치지 않는다. 평온한 마음 까지는 아니지만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한다.
내 마음을 알고 이제는 친구들이 장흥으로 내려온다. 휴가철, 물축제,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장흥을 구경하고 장흥의 매력에 푹 빠져드는 친구들. 장흥을 방문한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여기 참 좋다. 장흥이 이렇게 매력이 있는 줄 몰랐네. 볼 것도 많고 신나는 일들이 많을거 같아. 나도 나이 들어 장흥으로 귀촌할래” “그래 우리 나중에 모여살자”
우리 부부가 제2의 인생을 펼치는 장흥을 마음에 들어하고 귀촌하고 싶어하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장흥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그 멀리까지 간다며 말렸던 친구들이고 가족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우리의 삶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준다.
누구나 한번쯤은 시골생활을 생각한다.
장흥으로 귀촌한지 4년이 흐른 지금의 우리 부부에게 시골살이를 생각하는 분들이 이것저것 많이 물어온다. 어떻게 귀촌지를 물색했는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등 궁금한것도 참 많다. 벌써 우리가 귀촌선배가 된 것인가?
각박한 도시생활을 접고 파란 하늘아래 고즈넉한 들판을 바라보며 조용히 삶을 맡기고 싶은 꿈을 꾸며 산다. 그러나 막상 그 꿈을 실현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며,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연한 동경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려면 귀농귀촌을 결심하는 목적이 확실해야 한다. 그리고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 인터넷이나 TV로 보는 시골살이는 그저 환상일 뿐이다. 어느 곳이나 사람 사는 곳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진심을 다해 새로운 환경에 스며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도움 주신분들께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커다란 만족이 자리 잡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왔겠지만 시골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시골에 와서도 빡빡한 계획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그 계획을 이루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은 본인들의 문제이지만, 시간은 불가항력적으로 계속 흐른다. 보통 3년 정도 걸릴 일을 1년 계획으로 잡고 온다면 그 사람은 1년 후 틀림없이 귀농귀촌에 실패했다고 자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연의 3년이란 시간을 지나면 자신의 계획과 수확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을 잡고 귀농귀촌을 생각할 때, 가급적 시간에 대한 계획을 여유롭게 가지고 온다면 새로운 삶을 설계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 기간을 10년으로 잡았다. 무슨 일이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벌려야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해결하기가 쉽다는 생각에 남편나이 50, 내나이 48에 우리는 과감히 서울을 떠났다. 10년 이상은 충분히 어떤 일이든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함께. 그리고 지금은 지인들 모두 너무도 잘한 결정이라고 부러워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이곳에 적응해 가는 기간이긴 하지만, 이곳 장흥에서의 인생 2막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펼쳐 나갈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