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나 인자 장흥서 쭈~욱 살아불라요
김OO(용산면)
장흥에 온 날 : 2018. 7. 20.
장흥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던 사람이
직장 때문에 장흥에 와서 1년여 기간을 지내다보니
장흥의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서 인
생 2막을 건강 관리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웃과 더
불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귀촌인의 소박한 삶을 적어
봅니다.
나는 무안군 해제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 목포 제일중과 목포상고를 졸업하면서, 당시에는 들어가기 힘들다던 은행에 입사 하였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대단한 경사였다.
힘들게 살아오셔서 절약이 몸에 배셨던, 그래서 자린고비로 소문났던 할아버 지께서 얼마나 기쁘셨던지 돼지 두 마리와 떡과 음식을 마련해서 면민을 대상으로 잔치를 하셨는데, 당시에는 큰돈이 드는 행사였을 것이다.
서울에는 은행 입사 시험 때 처음 가봤다. 첫 근무지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 지점이었는데,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군에 입대하기 전 까지 11개월여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함께 일을 했다.
나는 6남매의 장남으로서 부모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하며 살았고, 아내는 집안의 가난을 종식 시키고자 안간 힘을 썼던 것 같다. 우리는 6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고, 1남 2녀를 두었으며 모두 출가해서 잘 살고 있다. 특히 외국회사에서 일하는 아들은, 직장일로 지난해 캐나다 토론토로에 살고 있는데 최근에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한동안 나는 장흥과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36년 동안 근무한 은행에서 퇴직, 10여년 전에 일 때문에 광주로 내려와 광주에 오래 살면서도 장흥에 들러 본적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여수나 순천에 가는 길에 점심때 부근을 지나는 경우 토요시장에 두 세차례 왔던 기억이 전부였다. 또 나는 평소에 산을 좋아해서 언제든 천관산에는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좀처럼 그런 기회도 오지 않았다. 그러던 2018년 봄,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아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흥에서 팬션을 관리하실 분을 찾고 있는데 형님이 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장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펜션 일은 8개월간 하였다.
처음부터 장흥에 살려고 마음먹고 온 것이 아니라서, 일을 접고는 고향 근처로 돌아가려고 생각했었다. 그때 마침 장흥에서 인연 맺게 된 분들의 강권으로 평화리의 빈집을 소개받았고, 1년동안 지내며 장흥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평화리는 읍과 인접해 있어 여러 가지로 편리했다. 특히 상선약수터, 억불 약수터, 억불산 등산로는 매일 가도 좋은 곳 들이다. 자전거로 천문과학관에도 오르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어디로 가든지 자동차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으면서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고, 임도나 탐진강변로 등으로 통하는 길도 좋았다.
읍에 다닐 때도 왠만하면 자전거를 이용하니 건강관리, 연료 절약, 환경보호 등 1석 3조를 얻는 느낌에 뿌듯했다.
평화리에서는 집에서 1시간 정도면 억불산 정상에 올라 멀리는 완도, 득량만, 장흥읍, 강진읍 등 주변 경관을 즐길 수 있었다. 1주에 1~2번 정도는 등산을 했는데, 가끔씩은 쓰레기 봉투를 가지고 가서 하산길에 쓰레기를 담아 왔다. 또 밤에는 거의 밤새 켜져있기 일쑤인, 인근의 천문과학관 주차장 화장실의 소등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새 장흥군민이 되어 있었다. 또한, 함부로 배출해서 수거해가지 않아, 마을회관 앞에 방치되고 있는 쓰레기를 재분리 해서 배출하기도 했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보시고 칭찬하셨다. 여러 차례 그런 일을 했지만 좀처럼 주민들의 분리 배출 행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평화리 집의 계약기간이 다가오자 그동안 장흥에 정이 들어, 좀 더 안정적 으로 장흥에 살고 싶어졌다. 장흥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해 보자고 마음 먹었을 때,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현 거주지를 소개받았고 장기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긴 소풍을 마치리라고 결심을 할 만큼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어진 집이라 일단 거주가 가능한 정도의 필요한 수리만 하였다.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아 내려앉은 온돌을 보수하고 아궁이와 굴뚝도 새롭게 설치하였다. 기존에지하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물 좋은 장흥이라 하지만, 식수로 사용하는 것은 좀 거시기 해서 상수도 인입공사를 하고, 지하수는 허드레 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귀촌을 염두에 두고 장흥에 온 것이 아닌데도 살다보니 너무 좋아 서 장흥 사람이 되었다.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리듯 시원하다. 멀리 천관산이 보이는 평화로운 녹색의 들판, 마음까지도 평화롭다. 귀촌 후 완전히 달라진 생활, 한 마디로 여유로움, 잔잔하게 젖어드는 만족감, 아마도 사람은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야 진정한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 있나보다. 거의 모든 조건이 다 맘에 드는데, 무엇보다도 요즘 같은 세상에 온돌방을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 땔감은 동네 여기저기서 베어낸 나무들만 가져다 때도 될 것 같다. 올2월에 이사했는데 5월말 까지 손님들이 와서 머문 4~5일을 빼고는 계속해서 온돌에서만 잠을 잤다. 오랫동안 침대 생활을 해와서 평소에는 바닥에서 자는 것을 불편해 했었는데, 온돌에서 자다 보니 어느덧 중독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일을 좀 해서 몸이 뻑적지근 할 때도 따뜻한 온돌에서 자고 나면 가뿐해 지곤 한다.
이곳으로의 이사를 결정한 것은 작년 말경이었다. 올 초부터 거의 매일 평일에는 2~3시간, 주말에는 5~6시간씩 들러 청소하고, 수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였다. 이웃 분들도 우리가 거의 매일 열심히 청소하고 칠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많은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사 일정에 맞추어 일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된데는 동네 어르신들의 조언이 큰 몫을 했
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모든 과정이 순탄하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상수도 인입공사 과정이었다. 공사 다음날 조그맣게 젖은 흔적이 보이더니 이틀정도 지나니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시공사에 연락해서 파보니 지하로 연결된 수채관로를 건드린 것이었고 바로 보완 조치도 되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그 과정에서 집에서 나가는 하수관이 막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경우를 전화위복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살다가 하수가 역류하는 일이 벌어졌더라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우선 원인규명을 하느라 생 고생을 했을 터이니 말이다.
하수관 공사를 하려면 포장된 마을 도로를 절개해야하는 머리아픈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 마침 코로나19 대응 상황에서도 민생을 챙기시던 정종순 군수님께서, 우리 마을을 지나시던 길에 우리의 귀촌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직접 찾아 주셨다. 전후 사정을 들으신 군수님께서 신속한 조치를 해주신 덕에 골치 아팠던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 되었다. 귀농귀촌인의 애로사항에 귀 기울여 해결에 힘써주시는 군수님이 참으로 고마웠다.
이곳에 와서도 몇 차례 동네 주변의 쓰레기를 주워와 분리 배출 하기도 하고, 마을 어귀에 베어져 있는 나무들을 정리하는 등, 묵묵히 주변 정화를 위해 솔선수범하려 하고 있다. 우리 마을은 수원 백씨들의 집성촌으로 전체 가구 중 3~4가구를 빼고는 모두가 백씨 문중 분들이시라고 들었다. 주민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이신데도, 한 두분 빼고는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것 같다. 다들 부지런하시고 점잖으시며, 친절하셔서 마을의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이 참 편하다. 인사를 드리면서 떡을 돌렸었는데, 많은 덕담과 반겨주심에 기분이 좋았다.
작년에 평화리에 살 때는, 오전에 보건소 건강증진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공공일자리 사업에 참여했다.
노인복지관의 자서전 쓰기 (전라남도 공모사업)프로그램에도 아내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 결과물이 나와 지난 10월 에는 9명이 엮은 자서전“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몰라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노인복지관에서 정종순 군수님, 위 등 군의회의장님, 도의원님들, 군의원님들을 비롯한 많은 내빈과 군민, 지인들의 축하도 받았다.
나는 장흥에 와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참 잘 한 것 같다. 코로나19로 인해 원격 수업이 시행되자, 아내는 장흥남 초등학교 돌봄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아내가 오전에 방문 요양하던 어르신을 내가 대신 케어 해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르신께서 양해를 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해심이 많고 속이 깊은 어르신께 참으로 감사드린다. 남자의 손이 필요한 집 수리 등 필요에 맞춰 드리니, 처음엔 다소 불편한 기색이셨던 어르신도 좋아하셨다.
우린 마음가짐이라도, 부모님께 못 다한 효도를 할 기회라 여기며 봉사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 하고자 한다. 며칠전에는 수원에 사는 어르신의 아드님이 내려왔는데, 어머님께서 너무 잘한다는 말씀을 늘 하신다고, 고맙다며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해 주셨다.
이제 학교가 개학을 하여 아내가 다시 어르신을 보살피니, 나는 공공일자리 사업에만 참여하고 있다. 아내는 장흥남초 원어민 영어 보조, 병설 유치원의 방과후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용산지역 아동센터에서 하던 영어재능기부는 사정상 잠시 중단한 상태다. 아내는 시골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고마워한다. 도시엔 이런 나이에 교사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란다. 아내의 어릴적 꿈이 교사였는데, 방과후 교사이긴 해도 선생님이 되었으니 꿈이 이루어 졌 다며 좋아한다. 20여년 넘게 영어를 놓지않고 노력하더니, 적쟎은 나이에도 일을 갖게 된 것이다. 홍콩에 3년 살 때도 아들 다니는 학교의 교장 부인 (캐나다 사람)을 사귀어, 과외도 받고, 거의 주말마다 트래킹도 함께 다니고, 영국 문화원에도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요즘 학교에 나가면서 더욱 활기가 넘친다. 손주 볼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애들이 너무나 귀엽고 예쁘단다. 영어 인재들을 발견하여 키워보고 싶고 전국 영어대회에도 내보내고 싶다며 나름 즐겁게 일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린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아내가 학교에서 느낀 것들을 얘길 하는데 공감하는게 많다. 군내에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그 애들을 몹시 짠하게 여긴다. 그들에게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를 체육이나 예술 방면의 소질이나 재능을 키워주거나, 성인이되어서 독립할 능력을 키워 주는 어떤 대책이 필요하다며 열변을 토한다. 정상아 들로부터 무시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숨 쉬고 나름의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한다. 교육청 등에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될 것 같은 문제이긴 한 것 같다.
대안학교 비슷한 어떤 장소, 폐교 등을 활용하여, 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공부 대신, 맘껏 공차고 노래하고, 만들고, 그림 그리거나 요리 등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 할 수 있게 이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싶다. 평범한 아이들 보단 부족하지만, 천진난만한 아이들 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나 재능 기부 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내는 유치원생 가르치는데 뭔 준비할게 그리도 많은지, 집을 온통 통차지하고 영어 교구나 자료들을 만드느라 발 디딜 틈이 없이 늘어 놓기 일쑤다. 코팅기, 절지기, 펠트, 색종이 등등 집안은 언제나 난장판이다. 내가 요리를 할 줄 아니 망정이지, 끼니 때가 되도 밥도 차리려 하지 않는다. 내가 차려놓고 부를 때 얼른 와서 먹기라도 해주면 좋겠다. 학교에 다니면서 더더욱 그리 되어간다. 아직도 철 없어 보일 때가 있는 낙천적인 아내가 그래도 사랑스럽다. 한평생 삼남매 키워내고, 집안일 실컷 했을 아내에게 이 정도는 배려 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얘기다. 서로 부족한 부분 감싸주며 건강하게만 살아 줘도 고마운 일이 아닌가? 난 아내가 부러울 때가 많다. 언젠가 만약에 다음 생이 있다면 남자로다시 태어나고 싶냐, 여자로 태어나고 싶냐? 묻기에 즉흥적으로 한 마디 했다. 내 대답을 들은 아내는 눈물까지 흘리며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 나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그게 그리도 우스웠나 보다.
우린 주말에는 가급적 자전거를 타면서 맑은 공기와 평화로운 자연 경관을 즐긴다. 보성, 벌교, 영암, 강진등지와 가깝고 아름다운 곳들이 많아 장흥은 물론 조금만 나가도 자전거 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성비 좋은 맛집들도 찾아다닌다. 취미가 같아서 참 다행이다. 양가 부모님들께서 멀리 떠나셨고, 아들과 두딸도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서 우리 둘만 잘 살면 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각종 봉사나 재능 기부 등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보람되게 지내고 싶다. 특히 동네 분들과 서로 도우면서 친하게 지내고 동네 일에도 솔선 수범하려한다. 우리부부의 이야기는 2020년 4월1일자 장흥투데이에 “ 장흥으로 귀촌, 제2의 인생봉사하며 행복하게 산다”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도 있다.
지인들이 안부를 물어오면, 장흥이 제법 복지나 문화적인 즐길 거리도 많고 살기가 편하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살 수 있다며, 여러 가지가 다 좋아 정착하기로 했다고 대답한다. 그들 중에 귀촌하여 사는 모습을 직접 와서 보고 싶다던 부부가 있었다. 우리가 서울에 살 때, 근처에 부자 국수라는 식당을 자주 갔었는데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멀리서도 식도락가들이 찾아오는 집이었다.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오며 헤어졌는데, 그 집 국수맛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특히 동치미 국수가 일품이었는데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그 부부가 지난 5월초 우리집에서 2박 3일 머물다 갔다. 그들은 수년전부터 강원, 경기 지역 등을 돌며 귀촌할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한다. 그들은 우리 동네가 참 좋아 보인다며 빈 집들을 둘러보았고, 부동산 소개소에서 얻은 정보로 군내 여기 저기 알아 보기도 하였으나 적당한 매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다음날에는 정남진 타워를 경유, 강진의 다산 초당에 들러 정약용 선생의 사상과 가르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는 남미륵사에 들러 철쭉을 구경하였다. 토요시장에서 사 온 제철 생선인 갑오징어를 안주삼아, 늦게까지 그들이 손수 담가온 전통주를 마셨는데 참 맛 있었다. 평소에 술과는 담을 쌓고 사는 아내도 맛있다며 몇 잔을 마셨다. 아우의 우크렐레 연주에 맞춰 노래를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큰 소리가 나도 띄엄띄엄 위치 한 이웃 집들에 민폐 끼칠 일이 없으니, 도시에선 상상도 하기 힘든 낙이다.
그들은 또 다시 5월말경에 강진쪽의 관심 부동산을 보러 내려왔다. 그러나 실물을 직접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계약은않기로 했단다. 생각 끝에 이왕에 먼 길을 왔으니, 어떤 분이 집을 지으려고 샀다가 사정이 생겨 매물로 내놓은 땅이라도 한번 봐 보겠느냐며 안양면 주소지를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가서 보고는 마음에 든다며 당장 매도인과 만나게 해 달라했다. 참으로 희한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들은 바로 계약을 하고, 다음 날 에는 잔금까지 완납했다. 초고속 특급 매매 완결판이었다.
그들은 귀촌하면 전통주를 빚으려고 계획 중이다. 지금 서울서 교육을 받는 중이고, 전통주 제조 허가도 받으려 추진 중이라 했다. 앞으로 귀농귀촌 교육도 받고, 필요한 것들을 철저히 준비해서 내려오겠다 한다. 아우는 의지가 강하고 추진력이 남다른 슈퍼맨이라 꿈을 이룰 것 같다. 여태껏 맛보지 못했던 다양하고 고급스런 전통주를 만들어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까지 진출하겠다
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다. 아마도 내년 초부터는 공장과 집을 짓기 시작해서 5~6월경에는 귀촌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왕이면 국수집도 하면서 전통주 체험 카페 같은 것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장흥에다 부자 국수집을 오픈했다는 소문이 나면, 아마 서울등지의 단골손님들이 국수가 그리워서라도 겸사겸사 여기에 놀러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장흥에 정착하게되면 그들 형제자매 들도 동반 귀촌을 하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한다.
또 아내가 웃음치료사 자격증 반에 다닐 때 사귄 친구가, 아내의 귀촌 스토리를 듣고 자기도 우리 이웃에 살고 싶다며 집좀 알아봐 달라 했다 한다. 원래 시골을 좋아 하여 귀촌의 꿈을 꾸던 중이란다. 귀촌하면 함께 봉사 공연을 다니자는 그녀는 웃음 치료, 마술, 색소폰등 일인 다역의 무대 공연을 하고있는데, 노래만 못 한다고 아내더러 노래를 맡아달라 한단다. 이젠 어르신들 즐겁게 해 드리는 봉사로도 재능 기부를 하고 싶다는 아내는 장흥에 오자마자 실버 가요제에 나가 대상을 탄 덕분에 이승길 회장을 비롯한 좋은 분들도 만나게 된 셈이다. 그 중 회원 한 분이 평화리 집도 소개해 주셨으니 군민들의 화합에 좋은 행사라 생각된다. 그 덕분에 이회장의 파랑새 봉사단에도 들어가 탐진강변 청소, 명절날 공원묘지주차 관리 등 봉사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게되 었다. 언젠가 아내의 친구가 귀촌을 하면, 군내를 휘저으며 무대에서 방방 뛰는 아내의 매니저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극성맞은 아내 덕에 심심할 틈이 없다. 그 많던 내 머리카락도 다 빠져버렸다.
우리 집 앞마당은 차 두 대를 대고도 한참 널널하고, 뒤에는 200여 평의 밭이 있다. 지금까지는 이웃 분들이 경작해 왔는데, 지난 겨울에 심었던 마늘의 수확이 끝난 지금부터는 우리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부녀회장님께서 주신 참깨와 들깨, 돈부, 옥수수 등의 씨앗들과 내가 사 온 대두콩, 서리태, 팥 등을 파종하였다. 상추랑 파도 얻어다 심었다. 잘 자라서 이웃들과도 나누고, 가족 친지들과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은행 퇴직후 김포에서 6개월정도 경작을 해봤던 경험과, 시골 부모님 농사지으시던 기억을 되살리고 또 동네 어르신들께 배우면서 터득해 가면 되지 않을까 한다. 직접 키운 먹거리로 상을 차리는 기쁨도 클 것이다. 게다가 나무를 때니 연료비도 아낄 수 있고, 도시처럼 각박하지 않아 널널하고, 맘도 편한데다가 절약이 제 2의 수입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서 흐뭇하다. 좀 더 일찍 귀촌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제라도 장흥에 살게 되어 참으로 좋다. 참새미골 팬션 사장님, 소개해 준 아우, 계속 눌러앉게 도와주신 많은 분들, 그 모든 인연들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느낀다.
이번 코로나19사태를 겪으면서, 장흥이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청정 지역임이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푸른 숲 맑은 물 장흥에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웃들과 더불어 자족하는 삶을 실천하려 한다. 기회가 될 때마 다 봉사에도 힘을쓰고 싶다. 그리고 캠핑카도 한 대 마련하여 시간 나는대로 전국을 유람하며, 사랑하는 친인척들과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맛난 음식도 나누면서 호연지기하며 살고 싶다.
최근에 누가 장흥 떠나면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나의 대답은 이랬다.“나 인자 장흥서 쭈~욱 살아 불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