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는 희망찬 장흥!
김OO(관산읍)
장흥에 온 날 : 2019년 11월 14일
청년이 장흥으로 오게 되면서 겪는 갈등을 통해서
성장 해나가는 이야기와 더불어 짝꿍을 만나 집을
장만하고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
전역 후 생활고로 인해서 생활 전선에 빨리 뛰어 들게 되었다. 처음엔 프랜차이즈 세탁소부터 선박 안전요원 그리고 내려오기 전까지 감정원 사무 계약직을 했다. 이 중에서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했지만 말 그대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었을까? 출근 할 때마다 우울한 기분은 점점 심해지게 되었고 이를 풀기 위해 출근 전 등산을 가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 6시에 일어나 1시간 정도 등산을 하고 밥을 먹고 출근 준비를 하면 몸은 조금 지치지만 머릿속은 상쾌했다. 우울한 기분도 사라지고 출근길 발걸음마저 가벼웠다. 그때부터 나는 아파트나 빌딩 숲이 아니라 나무와 동물 등이 있는 숲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주말에는 주말농장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지자체에서 하는 귀농 교육 및 합숙교육 등을 수료 후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다.
여러 지역을 알아보던 중 장흥에 지인이 있어 갔다가 넓게 펼쳐진 논과 나지막하게 둘러싸인 산들이 정겹게 느껴졌고 읍을 가로
지르며 수변이 아름다운 탐진강과 억불산의 우뚝 선 며느리 바위
그리고 남도의 명산인 관산의 천관산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 장흥
으로 귀농을 결심하게 되었다.
처음 마을에 왔을 때에는 마을 내에서 있는 시간 보다는 읍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등산도 가고 싶고 강변도 걷고 싶고 장흥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느끼고 싶은 것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마을 분들과의 접촉이 없기 때문에 마을에서 살고는 있지만 마을의 주민은 아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마을회관에 들어가 어르신들께 인사도 드리기도 하고, 이사 왔을 때 돌리지 못한 떡도 돌리면서 조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마을 아짐과 친하게 되어 일도 도와드리며, 아짐 집에 가서 식사도 하고 김치나 과일 등을 가져다주시며, 어머니 같이 잘해주시는 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에서 살던 습관 때문일까? 아짐이 불쑥불쑥 연락도 없이 찾아오시기도 하고, 어쩔 때는 내가 없어도 집안에 계시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아짐이 넉살이 좀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은 마을에 문화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익숙하지는 않았다. 횟수가 많아지면서 불편함이 생겼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 하던 중 지인의 조언으로 직접 말을 하는 것도 좋지만, 대문 혹은 문을 잠그면서 앞에다가 외출이라는 표시를 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 전까지 만해도 문을 따로 잠그거나 하지는 않았던 터라 좋은 방법일거라 생각이 들었다.
아짐이 처음에는 ‘왜 문을 잠가?’라고 말을 하시고는 그 뒤부터는 별말 없으셨다. 그리고는 오시는 횟수가 줄어들자 방법이 통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난 후 부터는 오히려 내가 아짐 집을 찾는 횟수가 늘었고, 시간이 조금 흘러 내가 왜 문을 잠갔는지에 대에서 이야기를 나누자 아짐은 말을 했으면 되는데 라고 하며, 미안한 기색으로 조금 어색 했지만 그날 가지고 간 아짐이 좋아하는 옥수수 기정 떡으로 화해?아닌 갈등 해소를 하며 훈훈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제는 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이라는 표시만 문 앞에 두는 것으로 대신 했다.
마을에 왔을 때는 뚜렷한 일자리가 없었다. 간혹 읍에서 하는 아르바이트 정도 이었다. 그러던 중 이장님 일을 몇 번 돕다가 다양한 일을 소개 시켜주셨다. 표고목 따기와 종균 넣기, 폐표고목 옮기기, 가축분 퇴비 뿌리기, 모판 나르기 등 농사일을 처음 하는 나에게 쓰지 않았던 근육을 쓰기도 하고, 농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신념 등을 이장님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 이었다. 더불어 마을 아짐들의 농사일도 있었는데, 고추 따기, 감자 캐기, 생강심기, 소 밥 주기, 고구마심기, 들깨 털기 등 이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경제적인 소득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살아가는 기술과 계절마다 내가 심고 거두는 작물에 대해서도 배울 수 가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마을에서 2년 가까이 바쁘게 생활하던 중 지역에 있는 모임을 통해서 지금의 아내와 만났다. 아내는 강진으로 귀농한 터라 결혼 후 지역을 어디로 가야할지도 정해야 했다. 처음에는 강진에서 조금 있다가 장흥의 풍경과 아짐들의 정이 그리워 다시 장흥으로 왔는데, 그 전에 살았던 마을에는 빈 집은 있으나 매매를 할 수가 없어 관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실 장흥의 풍경이나 아짐들과의 추억 때문에 장흥을 선택하기도 했지만 장흥에는 결혼장려금이라는 제도가 있어 관산에 집을 장만 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강진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었지만 장흥과 그 액수가 배 이상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내는 전입을 장흥으로 최초로 해서 추가로 장려금을 더 받을수 있어서 일석이조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후 쌀이 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뭐지 라고 했는데 군수님의 편지와 함께 장흥에 전입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와서 조금 놀래기도 하고 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집이 정리가 되고 주민등록증 주소도 바꿀 겸 관산읍 사무소를 갔는데, 직원 분께서 이사 오신 분이냐고 물으며 그렇다고 말하자 귀농하신 분들께 지원할 수 있는 정책사업 들을 상담해 주셨다.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빈집 수리비 지원과 출산장려금 그리고 영양플러스 사업 등 우리 신혼부부에게 맞는 사업들을 상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출산장려금과 영양 플러스 사업은 정말 좋은 정책같았다. 신혼부부인 우리에게 아이를 가지려는데 힘을 보태어 주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제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산모나 아이를 위한 식재료와 돌봄이 필요한 부분을 지원해 주는 사업 등이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사실 우리도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금 더 이르게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흥이라는 곳이 처음에는 단순히 자연경관이 좋아서 왔지만 생활을 할수록 아짐들의 정과 이장님의 배려 그리고 주변 이웃과 친구들의 격려와 더불어 장흥군에서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준 덕분에 혼자 와서 둘이 되고 이제는 셋을 바라 볼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