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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표본이 된 풍암 문위세(文緯世, 153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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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노복 100여명을 이끌고 낙안 ,순천을 경유 남원에 도착한 전라좌 의병대의 군량미 확보,조달 총책을 맡았으며 장수, 무주, 금산, 성주, 개령전투에서 군무를 계획하고 처리하는 지략이 뛰어나 제갈량으로 비유됐고 흰옷 입은 의병장으로 불려져「백의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문위세의 자는 淑章, 호는 풍암, 본관은 남평이다. 삼우당 문익점(1311-1400)의 9대 손이다. 아버지 참의공(參義公)은 사람이 태어난 것은 씨줄(緯)을 세대(世)마다 짜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위세(緯世)라고 이름을 지었다.
윤효하(尹孝夏)의 외손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호남의 대문장가요 대선비인 외숙부 귤정과 미암 류희춘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547년 14세때 안동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1501-1507)으로부터 제갈공명의 팔진도(八陣 - 군사조련용병술에 대한 연구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이 되어 왜군과 싸울 때 큰 힘이 되었다.) 및 성리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1567년(명종22) 명예와 명리에 관심이 없어 학문에만 정진했는데 어머니 尹氏의 명령으로 과거(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기보다는 유치면 늑용리 백운암(白雲庵)에서 제자 수 십 명을 거느리고 학문과 활쏘기, 말타기를 가르치면서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연구에 전심을 다했다.

1589년(선조22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면서 정철 등의 서인 세력에 의해 동인에 속한 선비1,000여명이 화를 입은 을축옥사(乙丑獄事)가 일어나자 모든 교유들과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92년 7월초 59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광해군의 사부를 지낸 죽천 박광전(朴光前, 1526-1597),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낸 삼도 임계영(任啓英 1528-1597)과 의논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 1592년 7월 10일 제자 몇 사람과 그의 아들 6남 1녀 중 5남뿐만 아니라 사위, 조카까지 강진, 해남, 영암 등지로 보내 200여명의 의병을 모으고 집안 노복 100여명을 이끌고 낙안 ,순천을 경유 남원에 도착한 전라좌 의병대의 군량미 확보,조달 총책을 맡았으며 장수, 무주, 금산, 성주, 개령전투에서 군무를 계획하고 처리하는 지략이 뛰어나 제갈량으로 비유됐고 흰옷 입은 의병장으로 불려져「백의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595년(선조38) 용담현(龍膽縣 : 진안군)의 현령에 제수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도 아들, 사위, 조카 등과 함께 500여명으로 구성된 수성군을 결성 왜병의 퇴로를 격퇴하고 적을 무찌른 공으로 1600년 67세때 파주목(坡州牧)의 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유치면 늑용리 사군대(思君臺)에서 가야금과 글을 벗하다가 그해 3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1644년 그의 학덕과 치덕을 흠모해 선비들과 후손들에 의해 월천사(月川祠)를 설립하고 배향한다.

그 후 1702년(숙종28) 태학(太學 : 성균관)의 선비들이 상소하여 비로소 사우(祠宇)로서의 규모(1785년 강성서원이라 함.)를 마련 1984년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였으며 팔진도(八陳圖), 임진왜란 창의일기(倡義日記)는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1722년(정조5)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영남학파거두)이 택한 신도비(神道 )가 유치면 늑용리 마을 입구에 세워졌다. 이 신도비는 남인들의 정치적 파란과 연관되어 매몰되었으나, 1812년에 황경원(黃景源 1709~1787 이조참판)이 택하고 유운제(柳運濟)가 썼다.

강성서원에 자리한 신도비의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공의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1798년 호남유생(任五源등 )의 상소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833년(순조33)부터 나주 충장사 (忠壯祠)에 배향되고 있다.

최종업데이트
2024.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