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공무원들께(이문옥 전감사관)
- 작성일
- 2002.11.11 13:29
- 등록자
- 다OO
- 조회수
-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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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문옥
제 목 : 후배 공무원들께
주 소 : http://dasan.new21.org/2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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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공무원들께
내 나이 쉰세 살이 되던 1990년, 나는 생전 처음 감옥생활을 경험해
보았다. 또 91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18년 동안 몸담아 왔던 감사원에서
파면당했다. 총무처에서 근무하던 기간까지 합치면 27년 일한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내 인생의 절반이라는 참으로 긴 세월을 공무원으로
살아왔던 내가 스스로 그 생활을 포기할 것을 결심했고, 또 저들은 나를 그
자리에서 이렇게 내쫓았다.
내가 저지른 죄명은 '공무상 비밀누설죄'다. 재판은 중단된 상태여서
아직 공식적으로 범법여부가 결정되진 않았다. 하지만 난 내게 그 어떤
이름으로든 죄의 명분이 덮어씌워지리라는 걸 알고서 그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식의 논리와 '악법은 어겨서
고쳐야 한다'는 투쟁의 논리 중 난 결국 후자를 선택한 셈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 투쟁의 논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솔직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폭로 이후의 내 인생이 어찌 될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고,
또 내게는 아직도 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미성년의 두 아이와 아내가
있었기에 갈등과 번민은 더욱 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갈등과 번민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절절히 느낀다. 내가 늦게나마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날이면 날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 모순의
덩어리들 속에서 그저 불평불만만 하다가 오욕스런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불평불만만으로 삶을 산 내가 곳곳에 부정과 비리를
낳으며 민초들의 고혈을 짜는 자들과 사실 달라야 얼마나 다를 것이며, 또
그들에게 무슨 말 한마디인들 떳떳이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난 그들의
부정의를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순의 재생산을
돕는 결과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은 또 얼마나 답답하기만
한 비겁한 삶으로 살아야 했었을까.
지금 난 내가 선택한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건 인간에게는 얼마나
살았는가라는 육체적 생명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라는 사회적 생명이
더욱더 소중함을 믿기 때문이요, 썩어 있는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는
수많은 동지들이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요. 그래서 이 세상을
결국은 온전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정의의 길을 실천하려는 나는 한편으로는 부끄러움과 또
한편으로는 자랑찬 마음으로 우리 후배 공무원들과 그리고 동료
공무원들에게 부탁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바로 당신들이 내가 그 속에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어 주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아니, 나는 밖에서,
당신들은 그 속에서 우리 함께 이루어 나간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공무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라.]
공무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라!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를 말이다.
"늘 꽉 짜인 명령체계에서 내가 맡은 임무를 수행할 뿐 그 무슨 재미가
있는 직업이란 말인가? 매일 작성해야 할 문서는 뭐 그리 많은지,
상급자들의 눈치나 봐야 하고, 게다가 감사 한 번 나온다 하면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혹시 내 옷에 묻은 먼지가 눈에
띨까 서류 뭉치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은 또 몇 번인가.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길 하나. 고급 공무원이나 되면 몰라도 말단인 주제에 무슨
명예나 지위나 권세가 있길 하나? 허긴, 뭐 망할 리 없는 직장이니 안정된
직업이라는 점에서는 그런대로 괜찮긴 하지만…… 아, 그렇지만 그렇게
고리타분하고 전망도 없는 직업보다는 자본금만 좀 있다면 차라리
사업이라도 벌여 보겠어."
공무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말을 듣고 대뜸 이렇게 반박할 어느
후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아니, 이렇게 반박할 공무원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그런데 요즘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차츰 높아지고 있다고들
한다. 일단은 반갑지만 그 이유를 들으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하도 취업난이
심각하고 망하는 중소기업이 많다 보니 안정된 직장에 사람들의 마음이
쏠린다는 것이다. 경제구조의 심각성이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고
있다니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인간이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육체노동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신노동을 한다. 육체노동도 옷을 만드는 일, 쌀을 생산하는 일.
기계를 만드는 일, 만들어 놓은 제품을 운반하는 일.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신노동도 사무를 보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병을 고치는
일,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 등 실로 가지가지이다. 그리고 이 대부분의
일들은 이 사회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들이다. 그런 점에서는 모두 소중한 일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일의 종류에는 이렇게 형태적인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엇비슷한 일이라 할지라도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대단히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기업은 개인의 소유물들이다.
이 개인들의 소유로 되어 있는 기업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넓은
의미로야 전체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그 소유주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 그 노동의 성과가 개인의 이익으로
돌아가며, 그 존재방식도 개인에 의해 고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는 일은 어느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늘 나라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다. 국민전체를
위한 민원업무를 보고, 국민의 안녕을 위해 치안을 맡고 있으며,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차를 몰고 사무를 본다. 개인에게 고용되어 그
개인의 부를 축적해주기 위해 하는 노동보다 얼마나 더 가치 있고 자랑스런
일인가.
이런 공무원이 스스로 열등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노동의 내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국민 모두를 위해 행해져야 할 우리의
노동이 특정한 정당이나 권력자들의 손아귀에서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가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자랑스럽지 못하게 만드는 모순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 아니,
먼저 공무원으로서의 자긍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자신의 철학과 행동에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어쩌면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인 것이다.
[생활의 철학부터 바로 잡자.]
우리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려면 우리의 노동이 진정으로 국민전체를 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세상의 비리에 영합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의 생활부터 청렴해야 하는 것이다.
증권투자로 세상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한때 폭락의 위기를 맞고
지금은 다소 기세가 꺾인 것 같지만 그래도 아직 증권투자는 여전히
사람들의 유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증권투자가 말 그래도 투기가 되어
있고, 우리 경제를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범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식투기의 바람이 우리 공무원
세계에까지 밀려든 것 같다. 어느 공무원은 융자까지 내서 주식을 샀다는
소문이 들리는가 하면 집까지 팔아서 주식을 샀다는 소문도 들린다.
어느 중앙관서의 과장이 수천만원어치 주식을 샀다. 한창 주식 열풍이
불던 88년에는 무척이나 재미를 보았던 모양인지, 그 이후에도 주식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떨어지는 날에는 몇 백만원 손해보고, 올라간 날에는 몇
백만 원 이익을 보니 그의 온 정신은 모두 주식에 가 있다. 날마다 얼굴
표정도 바뀐다. 값이 떨어지는 날에는 '학생들이 데모하고 야당이
시끄러우니 주식값이 떨어진다'며 화를 낸다. 값이 오른 날은 기분이
좋은지 직원들에게 차를 사겠다고 제 흥에 겨워 나선다. 그의 모든
희로애락이 주식시세에 달려 있고, 가치관마저 주식시세에 걸려 있는
듯싶다.
신문만 보면 주식시세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고, 어떤 날은 전화통에 불이
난다. 사자느니, 팔자느니, 얼마나 내놓겠다느니, 무슨 주식을 얼마에 몇 주
사겠다느니, 사무실이 무슨 증권거래소나 된 듯하다. 주식투자에 열을
올리는 다른 직원들까지 과장의 기분에 편승하여 사무실에는 그야말로
투기의 바람이 인다.
이것은 한탕주의가 공무원에게도 얼마나 심각한가를 얘기하려고 가상해 본
이야기다. 주식투기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도박의
습성도 뿌리 뽑혀야 한다. 어떤 이는 점심 먹으로 갔다가 밥상 나오는 시간
동안을 참지 못하고 화투놀이를 하는 경우를 보았다. 그리고 밤에는 아예
여관방을 빌려 놓고 화투치기에 몰입하기도 한다.
한탕주의.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의 씨앗은 자신의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데서, 부당한 이익을 취득하려는
발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잘못된 사회란 바로 그런 발상이 통용되는 사회를
말한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과 철학이 정의로울 리가
없다. 우리의 자긍심은 자신의 건강한 노동에 대한 대가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철학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승진, 영전에 연연하지 말라]
일에 대한 경험과 역량에 맞는 역할을 부여받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그러므로 정당한 절차와 경우에 따른 승진이나 영전 역시 분명히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고, 거기에 대해 기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승진, 영전에 목을 매지는 말자. 왜냐하면 거기에 목을 매기
시작하면 우리는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정당한 임무를 제대로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리라. 승진을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다른 약삭빠른 사람들보다 늘 뒤처지는 게 현실인데 무슨 소리냐고.
그렇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바로 거기에 우리가 승진에 목을 매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우리 공무원 세계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직 부여받은 임무를 사심 없이 성실히 해나가는 것만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혈연, 학연, 지연, 그
중에서도 영남출신인가 호남출신인가가 인사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고, 권력의 이익에 충성하는 자가 더 빨리 더 높이 출세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승진에 연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건 바로
모순된 구조의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는
출세의 연줄을 찾아 혈안이 되어야 하고, 상사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하며, 집권세력에게 절대 충성하는 길밖에 없다. 실제 이런 공무원들의
군상은 극소수일지언정 어느 부처에서나 발견된다.
명절 때마다 부리나케 유력인사에게 인사를 하러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적당한 예의범절이야 미덕이 될 수 있겠지만 이건 그런 정도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기 부서 상사건 다른 부서 상사건, 지금은 아니어도
장차 영전될 사람이라면 무조건 얼굴을 익히러 다니는 것이다. 인사 다닐 때
그들은 반드시 승진 경쟁자와는 함께 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늘 아는 사람 많다는 것을 자랑 삼는다. 사돈의 팔촌에다가
심지어는 명함 한 장 주고받는 사이를 가지고도 아주 절친한 것처럼
뻥튀기를 잘한다. 그것도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고위직을 많이
안다는 것은 상관에게 접근하기 위한 무기로 쓰인다. 왜냐하면 상급자들
역시 뒷배경이 든든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상급자에게는 상급자
나름대로 자기 출세에 그를 이용하려는 심사가 발동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격이다. 타산이 맞으면 그들은 급격히 친숙한 사이로 발전하곤 한다.
또 승진이 잘 되는 자리만 따라다니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사업무를
담당하거나 재정을 담당하는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다. 인사 업무에서는
기관장이나 상급자들의 의중에 따라 의도적으로 특정인의 인사평정을 좋게
해주어 승진결정에 유리하도록 사전 조성작업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상급자의 눈에 띄지 않겠는가. 재정을 맡고 있는 경리계장이나 총무과장의
위치는 또 어떤가. 이들은 정보비나 판공비를 쉽게 인출하거나 실제
예산지출 내역과 다르게 서류를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니 이들이
상급자의 의도대로 예산집행에 협력하면 당연히 그들의 눈에 들지 않겠는가.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흔히 일반 직원들이 잘 모르는 비밀도 많이
알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들의 입엔 가끔 예상치 않은 당근이 날아든다.
이들의 승진이란 결국 비밀누설을 막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감사원에서는 청와대 파견근무를 서로 가려고 한다. 그것도 역시 빨리
출세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니까.
승진에 연연하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바로 이런 유형의 인간으로
변화된다. 아니, 더욱 빠른 승진을 위해서는 그런 인간형이 될 것이
구조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그러니 승진에 목을 매는 사람에게 무슨 정의가
있고 도덕이 있겠는가. 그러니 어렵더라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승진,
영전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구조가 그러할수록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의연하게 자기의 할 일을 사심 없이 해나가자.
[맨 처음 한 번의 타협을 거부하라]
낮은 자리이건 높은 자리이건 자기 자리를 이용하여 돈 뜯는 데 재미를
붙인 공무원들이 가끔 있다.
TV의 고발 프로그램에서 본 것으로 기억된다. 교통경찰관들이 교통위반이
자주 일어나는 자리에 지키고 서 있다가 위반자들이 나타나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교통경찰이 돈을 의미하는 표현의
하나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교통질서를
바로잡으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부당하게 제 호주머니를 불리고 있는 이런
공무원이 다른 일을 한들 제대로 하겠는가?
이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이 세무담당 공무원과 인허가 담당
공무원들이다. 예를 들어 세무담당 공무원 중 돈 생기는 맛에 사는 어떤
부가가치 담당자가 신고납부기일을 앞두고 대상업체를 전부 방문한다고
가정해 보자. 담당업체는 약 200여 개나 된다. 업체에서는 당연히 세금이
적게 매겨지기를 바랄 것이고, 그러려면 이 담당관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리라. 그래서 그의 주머니에 3만 원짜리 봉투를 밀어넣는다.
들르는 업체마다 봉투를 넣어 준다. 이렇게 짭짤하게 챙긴 돈의 액수는
봉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뒷돈에 재미가 들어, 때만 되면 굳이 갈
필요가 없어도 업체를 방문한다. 역시 돈 봉투가 들어온다.
또 집을 개조하느라 허가를 맡아 본 사람들이나 말 많은 속셈학원 같은
것을 허가 맡아 본 사람들이 인허가 담당 공무원들에게 금품을 상납한
사례는 말을 안해 그렇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돈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공무원들 중에 어떤 이는 별
죄의식도 안 가질 것이다. 그리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액수도 차비
정도밖에 안 되는 정도라는 것이 그들의 핑계다. 또 한편으로는 큰 도둑들이
워낙 많으니 자신의 행위 정도야 뭐 죄가 될 게 있으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때 경계해야 한다. 한번 돈맛을 보면 두 번째에는
쉬워진다. 처음 받을 때야 꺼려지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일단 그 돈을
받아 쓰면 그 일을 합리화하는 자신의 논리가 생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습성이 되고, 점차 커져 가는 액수에도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봉투를 받을 때마다 은근히 좀더 두둑했으면 하는 마음이 인다. 한 번의
타협은 두 번, 세 번의 타협을 낳는 것이다.
자신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타인과도 타협하게 된다. 남의 부정과 비리를
보아도 비판할 자격을 잃으며, 세상은 늘 그러려니 싶기도 하다. 때로는
그들의 부정의 불가피성을 적극적으로 두둔하는 자신을 발견하게도 된다.
중요한 것은 맨 처음 한 번의 타협이다.
공무원들이여, 어렵더라도 단 한 번의 타협도 거부하라.
[공무원들의 손에도 노동조합의 깃발을!]
나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공무원이라는 사실에 진정 자긍심을 가지려면
생활의 철학부터 바로 가져야 하며, 그리하여 돈과 명예에 양심을 파는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이 바로 보이고 바로
들린다. 양심을 팔며 사는 자들에겐 똑같은 현실도 자기 눈에 맞게 보이고
해석되는 법이다. 이런 차이가 바로 세계관,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양심을 파는 타협을 하지 말라. 그래야 흰 것은 희고 검은 것은 검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야 양심이 가라는 길로 갈 용기가 생기며,
그래야만 그 길을 막는 장벽과 싸울 힘이 생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가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지키는
것은 그저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드시
없어져야 할 모순을 없애기 위함이며, 그리하여 우리 후대들을 정의가
물결치는 세상에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 양심껏
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낱낱이 흩어져 있는 모래알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흩어져
있어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시멘트와 물이 그 모래알갱이들을 단단히 이어
주어야 비로소 집이 지어지지 않는가 말이다. 홀로 선 양심은 흩어진
모래알갱이에 불과하다. 그건 집을 짓기 위한 아주 기초적인 재료일 뿐이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낱낱의 양심들을 이어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잘못된 구조의 맞붙어 싸울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 무엇이란
바로 노동조합을 가리키는 것이다. 홀로 선 양심들을 노동조합이라는 그릇에
담아야 한다. 우리에겐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
나처럼 개인적으로 퉁겨져 나오는 폭로식의 싸움이 아닌, 모순의 구조를 그
내부에서 뜯어고칠 힘이 생기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공장의 근로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미 사무직
일꾼들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간호사들도 만들었으며 교사들도 만들지
않았는가? 또 노동조합은 단순히 월급이나 더 받자고 만드는 조직이 아니다.
그 집단의 진정한 주체인 근로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고 그릇된 구조와
싸워 바로잡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현행 노동조합법은 공무원들의 노동조합 건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결사의 자유를 우리 공무원들에게는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에 이 나라 법이 공장 근로자들이라고 해서
노동조합을 허용했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근로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그
권리를 찾은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명제는 단 하나다. 악법은 어겨서라도 고쳐야 한다는 것!
우리의 단결권을 우리의 힘으로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랑스런 공무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80만 공무원들이여, 우리의 손에 노동조합의 깃발을 움켜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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