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원서(공무원노조활동과 관련 법 집행을 앞둔 판사님께)
- 작성일
- 2002.11.25 16:29
- 등록자
- 다OO
- 조회수
-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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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서신심
제 목 : 탄원서
주 소 : http://dasan.new21.org/2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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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법 집행으로 사회 정의를 세우는데 애쓰시는 판사님,
제 남편 이승찬은 지난 11월 4일 저녁 한양대에서 있었던 공무원노조 집회장소에서 연행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공무원노조 활동과 관련하여 구속된 공무원이 남편을 포함해 18명이고, 행정자치부의 징계요구를 받은 공무원이 591명에 이릅니다.
얄팍한 상식으로 法을 논하는 것이 무리인줄 압니다만, 11월 4,5일 합법적 연가를 내어 한양대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했다 하여, 건조물 침입죄와 지방공무원법 58조 집단행동금지 위반죄를 범했다는 검찰의 공소 내용을, 피고의 아내이기 이전에 국민의 한사람인 저의 法 정서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대학의 운동장은 모든 시민에게 개방하여, 아침운동 장소로건 집회 장소로건 많이 활용할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공공건물의 화장실조차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것이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의 권고사항이듯 말입니다. 건물의 기물을 부순 것도 아니고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한 것도 아닌데 운동장을 빌어 쓴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말입니까.
평화적 공무원 집회장에 참가자의 두 배가 넘는 전경을 투입하여 방패로 내리치고 강제로 끌어내는 바람에, 머리가 터지고 이가 부러지고 갈빗대와 발목인대에 상처를 입고 연행을 피하려던 공무원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 등 여러 사람이 다쳤습니다. 부당한 공권력 행사자에게 죄를 물어야지, 왜 정의로운 주장을 평화적으로 표출한 공무원이 구속과 징계를 겪어야 합니까.
국가공무원법 66조나 지방공무원법 58조는,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무원은 공무노동에 종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계를 꾸리고자 하는 노동자이며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근거가 불분명한 국민정서를 핑계삼아 공무원을 기본권 보장에서 예외가 되는 존재로 치부하려는 정부나, 공무원을 부당한 권력의 종복으로 계속 부리려는 기득권자들에게 죄가 있을지언정, 노동기본권을 확보하려는 공무원노동자의 단체행동은 헌법상 무죄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남편처럼 청렴 성실하고 정의로운 공무원이 핍박을 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편과 같은 선량한 공무원이 아닙니다. 공무원노조를 허용하겠다고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으면서도 임기 말에야 노조법 아닌 조합법을 들이민 현 정부의 수장 김대중 대통령과, OECD에 가입할 때 공무원노조를 인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공언하고도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무시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이야말로 처벌받아야할 자들입니다.
남편의 인사기록 카드를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70년 3월 서울시 지방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그해 7월 1일 임용된 후, 30년을 한결같이 청렴 성실한 공직자의 표상으로 살아왔습니다. 한국사회의 크나큰 병폐인 학연, 혈연, 지연의 인맥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인데도, 구청장 표창, 서울시장 표창, 대통령 포장까지 받은 유능한 공무원이었습니다. 공직사회에 흔한 것처럼 보이는 뇌물비리나 업무상 과실에 단 한번도 연루된 적이 없는 깨끗하고 정직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96년 김영삼 정부가 OECD에 가입하면서 공무원노조 허용을 국제사회에 약속하자, 97년 공무원노조 준비모임의 대표직을 맡았습니다. 용산구청 도시정비국에서 근무평정 1위로써, 불과 1,2년 내 사무관 진급을 앞두고 있던 그가, 대다수 하위직 공무원의 절대 관심사요 염원인 사무관 진급을 거부하면서까지 노조 건설에 앞장선 것은, 모든 공무원이 자신과 같은 청렴 성실함으로 공직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노조가 그 역할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용산구청 주택계장으로 일하던 96년과 97년에, 인허가 관련 청탁을 거부하고 소신과 원칙에 따라 업무처리를 하느라 겪던 귀찮은 과정을 저는 잘 기억합니다.
푸짐한 저녁회식을 제공하겠다는 민원인, 퇴근길에 따라 붙거나 휴일에 집으로까지 전화를 걸어 청탁을 하려는 업자, 선물을 보내려하니 집 주소를 불러달라는 백화점 직원, 휴가 잘 다녀오시라며 책상 위에 놓고 간 봉투, 과의 서무주임을 통해 전직원에게 배포되는 눈먼 상품권들….
그것은 박봉에 시달리는 뭇 공무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요 관례가 된 부패의 한 양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단 한번도 그러한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이 모조리 거절한 사람입니다.
덕분에 그는 30여년 직장생활을 하고도 아직껏 사글세방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하위직 공무원 월급으로 부모와 동생을 부양하면서 95년 저와 결혼함으로써 처자까지 부양하는 처지이다 보니, 정년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까지 하층 빈민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주변의 질시를 때로 받으면서도 이처럼 개인적으로 깨끗한 생활을 고수했으나, 공직사회의 부패와 불합리의 사슬을 끊는 일을 개인의 양심에만 맡기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걸 공무원들은 잘 압니다.
규모가 큰 비리일수록 고위직이 개입해 있고, 특별권력관계라는 미명하에 상명하복이 관철되는 조직문화 속에서 하위직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사명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권력층이 개입한 감사원 비리를 폭로하고 파면 구속됐던 이문옥 감사관이나 화성 씨랜드 참사에 연루되었던 공무원이 온몸으로 그 사실을 증명해 왔습니다.
노조라는 집단의 힘으로 내부비리 고발자를 보호하고 자기정화의 힘을 갖지 않는 한, 노동조합이라는 단결체가 단체행동권까지 보장받지 않는 한, 고질화된 부패를 거두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노조를 염원하는 모든 공무원 뿐 아니라 저 같은 소시민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97년부터 공무원노조 건설에 관여하게 된 남편은, 98년초 정부가 IMF 체제 극복을 이유로 공무원 임금 10% 일률삭감을 발표하자, 고위직의 삭감률을 높히고 하위직의 삭감률을 낮추라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이로 인해 남편은 98년 용산구청에서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2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법원은 해임을 취소시켰고, 2000년 용산구청이 견책이라는 경징계로 바꾸면서 남편을 복직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오늘 남편의 인사기록 카드에서, 표창-표창-포장-표창 뒤에, 해임-해임취소-견책이라는 기록을 읽습니다.
오늘날 판사님께서 공무원노조 건설에 앞장선 이들에게 어떠한 형사처벌을 내릴지라도, 각 자치단체장들이 어떠한 행정처벌을 할지라도, 멀지 않은 훗날 결국은 명예회복이 되고 보상이 따르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의 남편의 궤적이 그것을 보여주거니와, 89년부터 10년에 걸친 교사들의 노조운동이 또한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의 그러한 투쟁의 과정에서 여러 가정이 파괴되었고, 건강을 해친 끝에 죽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노릇을 벗어나 좀더 진보적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견지에서 판결을 내렸더라면, 그러한 희생은 최소화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노조 일로 탄압 받는 수백 명 공무원 가족이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줄이는데 판사님의 역할이 큽니다. 모쪼록 판사님께서는 불과 얼마 후에 있을 공무원 노동기본권 회복의 시대를 맞이했을 때 부끄럽지 않을 판결을,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진보적 법조인다운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2002년 11월 24일
용산구 공무원직장협의회 /
공무원노조 용산지부장 이승찬의 아내 서신심 올림